JTBC-GOLF

구속된 정몽구 회장 인간탐구

이임광 기자이코노미스트 2006-05-03

[구속된 정몽구 회장 인간탐구] 측근들을 믿지 못한 것도 화근… 두번째 구속

▶눈시울이 붉어진 정몽구 회장.

정몽구(68) 현대·기아차 회장이 4월 28일 전격 구속되자 그의 주변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재계 인사들은 “정 회장이 의리파 보스형 경영인이었지만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게 흠이었다”며 “그런 것이 누적돼 결국 오늘의 구속사태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렇다면 ‘인간 정 회장, 기업인 정 회장’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경영 스타일이 혹시 이번 사태를 불러오지 않았나 심층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보스형 경영자로 알려져

몇 년 전 현대자동차는 한 젊은 박사급 인재를 임원으로 영입해 연구 프로젝트를 맡긴 적이 있었다. 꽤 중요한 프로젝트였는지 연구 성과를 그 임원이 직접 회장에게 보고해야 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회장실에 보고할 임원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장들도 10분 전 회장실 문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철칙으로 돼 있는 현대차 분위기로는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초유의 사태에 비서실은 긴장 상태에 휩싸였다. 잠시 뒤 그 임원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정 회장은 진노했고, 늦은 이유를 물었다.

그런데 그 임원의 대답은 정말 가관이었다. “차가 없어서 늦었습니다”였다. 정 회장으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동차 만드는 회사의 임원이 차가 막힌 것도 아니고 차가 없어서 늦었다니’ 모두들 폭발 직전의 정 회장 눈치를 보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 회장은 화를 내기는커녕 호탕하게 ‘껄껄’ 웃는 게 아닌가. 보고를 받고 난 뒤 정 회장은 지원부서에 전화를 걸어 “이 친구 차 한 대 내주라”고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이 총수가 된 지난 7년 동안 그룹 전체에서 해고된 전무급 이상 임원은 무려 400명에 달할 정도다. 1년에 57명꼴로 회사 중역들이 정 회장 말 한마디에 보따리를 싼 셈이다. 심지어 한 달을 못 버틴 사장도 여럿 있다.

현대차의 한 전직 임원은 “중역으로 있는 동안 언제 그만두게 될지 살얼음판을 걷는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며 “어떤 때는 먼저 사표를 쓰고 싶은 충동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이 임원은 결국 예고도 없이 퇴사 명령을 받고 30년 가까이 몸바쳐 일한 회사를 떠나야 했다.

임원들의 불만은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정 회장식 인사에는 전관예우란 없었다. 대부분의 다른 그룹에서 퇴직 임원에 대해 일정 기간 자문역이나 명예직으로 보수와 함께 대우해주는 것과는 달랐다. 현대차그룹 임원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날로 집으로 가야 한다. 수년 전 해직된 어느 전직 임원은 “퇴직금은 퇴직금이고, 그래도 20~30년씩 회사를 위해 일한 우리인데 단돈 500만원이라도 위로금을 줬다면 그렇게 섭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회사와 정 회장의 매정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불만들이 있는 전·현직 임원들은 정 회장을 고 정세영 명예회장과 비교하곤 한다. 정세영 회장 시절에는 퇴직한 임원이라도 신규 사업에 적합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면 잊지 않고 불러주는 인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서울 서초구청 인근의 한 사무실에는 현대차그룹 퇴직 임원들의 모임이 있다. 회사에서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주로 억울하게(?) 퇴직한 임원들이 자체 조직한 것이다. 한 번은 이곳의 한 인사가 모임을 대표해 정 회장을 독대했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현대차에서 하청이라도 받아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정 회장은 일언지하에 이들의 청을 거절했다. 퇴직 임원들로부터 적잖은 원성을 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현대차 사태의 발단이 된 ‘내부 고발’은 이런 정몽구 회장식 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정 회장의 인사 파행이 도를 넘어섰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전에 나왔다. 정 회장은 그동안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뚝심 있는 ‘의리파’로 알려진 정 회장이 어떻게 동고동락한 임원들에게는 그토록 냉정할 수 있었을까.

정 회장의 학창 시절로 돌아가 보자. 어린 시절 정몽구 회장은 공부보다는 운동을 좋아했다. 또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성격이었다. 1955년 경복고에 들어가서는 럭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학내에 럭비부가 있었다. 럭비는 건장한 체구의 정 회장이 좋아할 만한 과격한 운동이다. 럭비부에 들어간 정 회장은 학교뿐 아니라 집에서도 유니폼을 입고다닐 만큼 럭비에 푹 빠져 지냈다. 나중에는 주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럭비부원들은 젊은 혈기를 못 참고 종종 패싸움을 했었다고 한다. 광화문과 정동 일대가 주무대였다.
그의 동생인 정몽준 의원은 “어렸을 때 청운동 집 근처 동네가 소란스러워서 나가보면 몽구 형님이 있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정 회장과 같은 경복고 출신으로 전경련 부회장을 지낸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다. 하루는 불량배들이 손 총장을 위협한 적이 있었다. 바로 그때 정 회장이 나섰다. “공부 잘하는 손병두를 건드리지 말라”며 친구를 보호했다. 손병두 총장은 “당시 몽구는 약한 친구를 보호하는데 주먹을 쓸 줄 아는 의리파”였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활달한 성격에 의리까지 있어 정 회장에게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중에 함께 일하게 된 입학 동기로는 유인균 전 INI스틸 회장, 노관호 전 현대차 사장 등이 있다. 3학년을 한 번 더 다니면서 사귄 친구로 오영건 전 현대차써비스 부사장, 이영직 전 현대중공업 전무 등도 모두 친한 친구들이다.
어린 시절을 보면 정 회장은 친구를 잘 사귀고 의리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장자 대접 못 받아 상처

1980년 초 어느 날.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주재하는 가족회의에서 후계자 문제가 거론됐다. 당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물론 ‘영’자 항렬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몽’자 항렬에서 찾으라는 얘기다. 구두 투표 끝에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가 몽헌이었고, 가장 적은 표가 나온 후보가 바로 몽구였다.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은 “몽구는 잡화상을 맡기면 잘할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잡화상이란 ‘현대정공’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평소 “몽구는 화끈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사업보다는 정치를 하는 게 더 성격에 더 맞을 것”이라는 얘기도 자주 했다고 한다.

경주에 있는 현대호텔 출신의 한 인사 얘기를 들어봐도 흥미롭다.
“고 정몽헌 회장이 호텔에 들르면 국제신사가 왔다고 했어요. 아침이면 조용히 혼자 식당에 와서 종업원이 음식을 갖다 줄 때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깍듯이 했다. 정몽준 의원은 좀 달랐다. 매우 까다롭게 음식에 대한 불만을 많이 표시했다. 그런데 정몽구 회장은 완전히 달랐다. 그는 아침을 먹으러 오면서도 마치 거물 정치인 같이 주변에 10여 명을 대동하고 와서 밥을 호탕하게 먹고 갔다.”

이외에도 그의 호탕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많다.
현대자동차그룹을 맡은 뒤 자신의 금융 지식이 부족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던 정 회장은 국제 금융도시인 영국의 런던으로 날아간다. 여느 출장 때처럼 수행원들은 비즈니스석에, 자신은 일등석에 앉아 갔다. 상공에서 그는 위스키(시바스리갈) 한 병을 다 비우더니 곯아떨어졌다. 런던에 도착해서는 주재 임원들을 그의 부인들까지 전원 소집시켰다. 함께 식사를 마친 정 회장은 임원들에게 다들 자고 가라면서 자신이 묶는 호텔에 방을 다 잡아주었다고 한다. 정 회장의 호탕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처음으로 가족회의에서 현대그룹의 후계구도를 논의한 이 대목은 정 회장의 순탄치 않은 앞길을 예고했다.

정 회장은 2남이지만 장남인 고(故) 정몽필 인천제철 사장이 198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는 바람에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해왔다. 그는 자신이 당연히 현대그룹의 후계자가 돼야 한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정주영 명예회장)는 장남격인 자신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못내 섭섭해 했다고 한다. 1978년 탈세혐의로 정주영 명예회장이 위기에 처했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70일이나 옥살이를 한 그다. 장남으로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버지 정주영 회장에게 경영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현대그룹에 정통한 한 인사의 말이다.
“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은 영어를 매우 중시했죠. 사람을 영어로 평가하기 일쑤였어요. 그런데 동생들인 정몽헌 회장이나 정몽준 의원은 영어가 능통했어요. 그래서 정주영 명예회장은 두 사람을 매우 유능한 아들이자 경영인으로 평가했죠. 하지만 정몽구 회장은 솔직히 영어를 좀 못했어요. 그러니 아버지 눈에 어떻게 보였겠어요. 더구나 자동차 기업은 국제 감각이 필수인데 영어를 못했으니.”

자신이 현대가의 장남으로서 가업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데 가족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즈음 그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증폭됐을 것이다. 이때부터 사람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귀띔이다.

의심 많아져 사람 가리기 시작

그는 경영수업을 받고 있을 때부터 직원들을 100%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몇 가지 일화들을 살펴보자. 그가 현대자동차 자재부장으로 있던 1972년 울산에 폭우가 쏟아졌다. 울산공장에 쌓여 있던 자동차 부품이 모두 물에 잠기는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됐다. 당시 물에 잠긴 부품은 포드에서 수입해온 것들로 현대차가 팔고 있던 코티나 1000여 대를 수리할 수 있는 물량이었다. 이 사실을 안 포드는 안전 문제를 들어 물에 잠긴 부품을 전량 폐기처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현대차 측에서는 부품이 하도 귀하던 시절이라 서울 원효로로 옮겨 녹을 벗겨내고 기름을 칠했다. 장부상으로 폐기처분했지만 실제로는 이를 유통시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이때 부품 유통을 책임지고 있던 한 직원이 주머니를 따로 챙긴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회사에서 감사에 착수했고 이 직원은 해고될 처지에 놓였다. 궁지에 몰린 이 직원은 불법 유통시킨 자동차 부품 관련 전표를 국세청에 건넸다. 당시 세금 포탈 혐의로 정 회장은 엉뚱하게 곤욕을 치렀다. 직원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 것은 그때였다.

1973년 그는 현대조선 자재부장으로 발령받았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몇몇 직원들이 업체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즉시 관련 직원들을 쫓아냈다. 자재는 믿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정몽구 회장을 당시 부장으로 발령낸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정 회장에게 “머리 좋은 사람은 다 골라가라”고 지시했다.

1974년 정 회장은 현대자동차 서울사업소 사장으로 부임한다. 고작 113명으로 출발한 작은 회사의 사장이었지만 의지를 불태웠다.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자신의 사업가적 자질을 검증받는 첫 단추였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우선 검은 수수료 관행에 칼을 빼들었다. 정비 차량 수요가 늘자 지친 고객들은 정비공들에게 돈을 집어 주기 시작했다. 당시 AS업계에서는 현장 직원들이 부품을 교체해 준 뒤 중고품을 밖으로 빼돌리거나 친인척 차량은 무료로 정비해 주기도 했다. 정 회장은 현장을 수시로 돌아다니면서 부정부패에 관련된 인물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일벌백계했다.

지배구조 다지느라 인심 잃어

1995년 12월 28일. 그는 소원대로 현대그룹의 회장이 된다. 2세 경영시대가 열린 것이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정씨 가문에서 장자인 정 회장에게 승계가 이뤄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날 현대그룹이 발표한 인사 내용을 들여다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정 회장을 그룹 회장으로 추대하면서도 그룹 부회장제를 신설해 동생인 정몽헌 현대전자 사장을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동시에 정몽헌 그룹 부회장은 현대건설과 현대상선의 회장직도 겸임하게했다. 현대자동차 회장에는 정몽규 현대자동차 부사장이 임명됐다. 정몽구 회장은 그룹 회장이지만 현대정공, 현대차써비스, 고려산업개발, 인천제철, 현대강관, 현대산업개발 등을 총괄하는 데 그쳤다.

현대전자와 현대건설은 동생인 정몽헌 회장이 관할하도록 하는 인사였다. 정세영 명예회장이 퇴진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정몽규씨를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선임한 것을 놓고 자동차가 정세영씨 몫으로 분리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현대그룹 회장직을 정몽구에게 물려줬지만, 실제는 형제간 계열 분리가 복선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정 회장이 그룹 회장을 맡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자, 건설, 상선은 정몽헌 지휘체제였고 자동차는 정몽규(정세영씨 아들)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1997년부터 기아자동차 부도설이 급속히 유포됐다. 정 회장은 이때 유기철 현대정공 부회장에게 기아차 인수 방안을 은밀히 지시한다. 현대차 정몽규 회장도 박병재 사장을 불러 기아차 인수 작업을 검토시킨다.

1998년 12월 현대그룹은 중대 발표를 한다. 그룹을 자동차, 전자, 건설, 중화학, 금융 및 서비스 등 5개 소그룹으로 분할하고 현대그룹의 자동차 부문을 단일법인으로 합병해 일원화한다는 것이었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공동대표이사에 정 회장이 선임됐다.

하지만 그해 5월 들어 경영권 분쟁은 ‘3부자 퇴진’으로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 와중에도 정 회장은 자동차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현대차는 결국 그해 10월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된다. 사옥도 양재동으로 옮겼다.

그토록 원하던 현대차그룹을 손에 넣었지만, 정 회장은 정통성을 완전히 확보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과 숙부인 정세영 명예회장의 사람들뿐이었다. 정 회장은 그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순탄치 않았지만, 여전히 위태로운 자리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가신이 필요했다. 현대정공 출신들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의 정 회장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였다.

기존 현대차그룹의 요직은 이때부터 끊임없이 현대정공 출신들로 교체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1999∼2000년 동안 차를 만드는데 들이는 시간을 인력 교체하는데 다 썼다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현대정공 출신이 현대자동차 출신을 밀어내고 요직을 차지하는 것을 두고 ‘주유소가 정유사를 습격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털어서 조금이라도 문제(비리)가 포착되면 가차없이 문책하고 퇴출시키는 칼바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정몽구 회장이 기아차 인수 후 소하리공장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공장장이 정 회장에게 브리핑을 마친 후 공장 이곳저곳으로 안내했다. 공장장이 앞장을 서며 “회장님, 이리로 오십시오”, 또 “회장님, 저쪽으로 가시지요”하고 인도하자 정 회장은 따라가면서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정 회장이 시찰을 마치고 올라간 뒤, 수행 임원이 공장장에게 “어디 회장님께 이리저리 가자고 할 수 있느냐”며 “회장님께서 가시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가신이라고 지적받은 현대정공 출신 임원들의 회장 의전방식이 종종 문제가 됐다는 얘기다.

가부장적 사고방식도 화 불러

현대차 출신의 한 재계 인사는 “전문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현대정공 출신들이 경영을 주도하는 탓에 생산라인을 신설하고 신차를 개발하는 타이밍을 놓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런 파행적인 인사가 지속되면서 기존 자동차계열 임원들은 언제 자리를 잃을지 모르는 위기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의리파’ 정몽구 회장이 인심을 잃고 주변에 많은 적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정 회장은 가문의 장자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고 한다. 장남인 고 정몽필씨가 1982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후 그는 아버지를 여읜 조카들의 아버지 역할을 도맡아 했다. 4남 고 정몽우씨의 아들인 일선·문선·대선씨에 대한 정 회장의 관심은 각별하다. 사실 그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 몽우씨였다. 그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96년 정 회장이 그룹 회장이 된 몇 달 뒤였다. 그는 개인 돈을 들여 동생 묘소 주변 환경을 일제히 정비했다. 또 묘소까지 차가 다니지 못했는데 주변 땅을 사서 차로를 내주기도 했다.

정 회장이 큰 조카인 정일선씨에게 쏟은 정은 각별하다. 일선씨가 태어난 뒤 처음 본 정씨 가문의 남자는 아버지인 고 정몽우 회장이 아니라 큰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고 정몽우씨는 숙대 출신의 이수진씨와 사귀었다. 1970년께 수진씨가 출산했다는 소식이 변중석 여사에게 전해졌다. 물론 결혼하기 전이었다. 변 여사는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얘기를 못하고 정 회장에게 먼저 알렸다. 정 회장은 사람을 시켜 봉투를 급히 보냈다. 입원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변 여사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정일선씨였던 것이다.

정 회장은 일선씨를 조카라기보다 아들처럼 여겼다. 일선씨와 아들 의선은 동갑내기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함께 지냈다. 일선씨는 고려대 산업공학과를, 의선씨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정 회장은 1996년 일선씨를 현대차 기획실에 입사시켰다. 이후 현대모터아메리카(HMA) 구매, 기획관리, 기아차 기획실 등으로 경영 수업을 시킨 뒤 2000년 계열사 BNG스틸 상무로 보냈다.

정 회장은 자신의 아들인 의선씨를 진급시킬 때마다 일선씨도 똑같이 승진시켰다. 두 사람은 2002년 전무, 2003년 부사장, 2005년 사장으로 각각 동반 승진했다. 정회장은 일선씨의 동생인 문선씨와 대선씨의 유학 경비를 개인 돈으로 대기도 했다. 이들 조카도 BNG스틸에서 경영수업을 시키고 있다.

한때 가신들의 농간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던 넷째 동생인 고 정몽헌 회장에 대해서도 정 회장은 애정이 있었다. 정 회장이 서울 계동 현대그룹 본사에서 투신했을 때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동생의 주검 곁을 지켰다. 2001년 고 정몽헌 회장의 딸인 정지이씨가 싼타페를 사고 싶어 현대차 매장에 들렀다는 보고를 들은 그는 비서를 시켜 “큰아빠가 사줄 테니까 무슨 차든지 사라”고 했다고 한다.

정 회장은 자신이 가문을 이끌어야 한다는 강한 ‘장남의식(콤플렉스)이 있다. 그리고 자연히 그 장남의 역할은 외아들인 정의선 사장이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정의선 사장에게 더 많은 지분을 확보하도록 하고 하루라도 빨리 그룹 후계자로 키우고 싶었던 것이다. 가신보다 믿을 만한 사람이 자식이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사고가 강한 정 회장에게 아들 정의선 사장은 전부나 다름이 없다. ‘벌을 받아야 한다면 아들 대신 내가 받겠다’ 는 정 회장의 의연한 태도는 ‘의리’보다 강렬한 본능 같은 것일지 모른다.

뉴스 전체보기